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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야경 관광 명소 아름다운 궁궐 수원 화성 행궁 여행 방화수류정 서울근교 여행지 추천 [경기도 수원 가볼만한 곳]

by AndynTrip 2021. 5. 22.

야경 관광 명소 아름다운 궁궐 수원 화성 행궁 여행 방화수류정 서울근교 여행지 추천 [경기도 수원 가볼만한 곳]

수원 화성 행궁 야간에 출사 겸 여행을 다녀 왔습니다.
야경을 찍으려면 먼저 수원 화성을 가라고들 합니다. 그만큼 유명한 야경 출사지이기도 합니다.

수원 화성을 소개 하자면,
조선 성곽 건축의 꽃, 수원화성은 조선 제22대 정조대왕이 장헌세자에 대한 효심으로 부친의 원침을 수원 화산으로 옮긴 후 1796년 9월 완공된 성입니다.

수원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이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 화산으로 천봉하고 화산 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 팔달산 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습니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수원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하였습니다.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습니다.
수원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습니다.

수원화성은 축조이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되었으나 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砲)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10, 은구 2 총 49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시설물 일부가 소멸되었습니다.
(현재 소멸된 시설물 :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 / 남수문 2012년 6월 복원 완료)

수원화성은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20년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현존하고 있습니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으로 성곽자체가 "효"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외에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가지는 성으로 이와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수원화성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습니다.

성벽은 외측만 쌓아올리고 내측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내탁의 축성술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성곽을 만들었으며, 또한 수원화성은 철학적 논쟁 대신에 백성의 현실생활속에서 학문의 실천과제를 찾으려고 노력한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벽돌과 석재를 혼용한 축성법, 현안ㆍ누조의 고안, 거중기의 발명, 목재와 벽돌의 조화를 이룬 축성방법 등은 동양성곽 축성술의 결정체로서 희대의 수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당대학자들이 충분한 연구와 치밀한 계획에 의해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하여 축성하였기 때문에 그 건축사적 의의가 매우 큽니다.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성곽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록으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수원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보물 제403호), 장안문, 서북공심돈(보물 제1710호), 방화수류정(보물 제1709호) 등이 있다. 수원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습니다.

정조의 효심 깃든 화성행궁입니다.
정조는 21세기 현재적 관점에서 생각해도 정말 대단한 효자입니다.
조선 500여 년의 역사만이 아니라 우리 역사 전체에서도 정조는 진짜 효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정조가 효자인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효자의 개념인 허벅지 살을 베어 부모를 위해 국을 끓여 주거나 아니면 추운 겨울날 몇 개의 산을 넘어 무릉도원을 찾아가서 복숭아를 따가지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정조의 효는 바로 사도세자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에 기반을 둡니다.
억울하게 뒤주에서 돌아가신 사도세자의 불명예를 회복하고 국왕으로서의 지위를 복권해 주는 것이 사도세자를 위한 효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정조는 몇 가지 특별한 행사를 추진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아버지처럼 군복을 입고 행차를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사도세자는 15세에 영조를 대신해서 대리청정을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군복을 입고 말을 타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정조는 국왕이 되고 나서 사도세자처럼 외부로 행차를 할 때 곤룡포와 익선관을 쓰지 않고 군복을 입고 전립을 썼습니다.
그리고 1791년(정 조 15)에 사도세자가 했던 것처럼 군복을 입고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 초상화는 사도세자를 수원으로 이전한 묘소인 현륭원 재실에 걸어놓고 살아계실 때 행하지 못한 효도를 행하겠다고 했습니다.


정조는 사도세자가 진정한 무인군주(武人君主)임을 강조하기 위해 아버지가 만든 18가지의 무예에 마상기예 6기를 추가해 24가지 무예로 만들었습니다. 이 무예서가 바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입니다.
『무예도보통지』 서문에 자신은 아버지가 한 일을 따랐을 뿐이라고 겸손하게 이야기 합니다.
조선의 무예를 새롭게 정리하여 중국과 대등한 군사체제를 갖추고자 한 모든 것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유업이고 자신은 그 유훈을 계승한 것이라는 것을 백성들과 신료들에게 이야기해서 사도세자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처럼 항상 무예를 수련하고 활쏘기를 했습니다. 조선 역사상 태조 이성계와 더불어 최고의 명궁(名弓)으로 평가받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정조가 대궐 밖으로 행차를 할 때 반드시 군복을 입고 말을 타고 다녔습니다. 그 이유도 사도세자가 온양으로 행차할 때 군복을 입고 말을 타고 갔기 때문입니다.
가마를 타거나 곤룡포를 입을 수 있었음에도 사도세자는 군복을 입고 직접 말을 몰았는데, 이러한 행동이 의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 정조는 아버지를 따라 늘 군복을 입고 말을 타고 다녔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조 효의 핵심입니다. 정조가 이러한 효를 실천하기 위한 터전으로 선정한 곳이 바로 수원이었다.

화성을 또 하나의 수도로 건설 하려고 했습니다.
정조는 화성유수부에 장용영외영을 설치하면서 그 이후 장기적인 계획을 준비했습니다. 바로 수원을 새로운 또 하나의 수도로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기존 수도인 한성부와 함께 자신이 머물면서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수도를 말입니다. 이를 위해 대대적인 화성 건설을 추진했습니다.
정조가 더 일찍 화성건설을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794년(정조 18)에 시작한 것은 정조에게 숨은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으로 이전하고 세자를 얻었습니다.
훗날 순조가 된 세자가 태어난 해는 1790년입니다. 정조는 세자가 15세가 되면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어 수원에서 머물기를 희망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사도세자의 복권 때문이었습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죽고 난 후 영조는 사도세자에 대한 어떠한 이야기도 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사도세자에 대한 충성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세자에 대한 칭찬을 해도 그것을 역모라고 규정지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세손인 정조에게 훗날 국왕이 되었을 때 절대로 사도세자를 역적의 죄목을 벗기고 국왕으로 추존하지 못하게 하는 특명을 내렸습니다.
이러한 할아버지 영조의 명령 때문에 정조는 자신이 국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사도세자를 국왕으로 높이 받들지 못했습니다. 조선시대 국왕이 돌아가신 자신의 생부(生父)를 국왕으로 받드는 일이 실제로 존재했습니다
인조가 자신의 부친 ‘정원군’을 원종(元宗)으로 추존하여 종묘에 위패를 봉안하게 했습니다. 정조 역시 사도세자를 이처럼 추존하고 싶었으나 할아버지 영조의 엄명으로 그렇게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조는 묘책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아들이 15세가 되면 국왕의 지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상왕이 되는 것입니다. 새로 국왕이 된 세자가 할아버지인 사도세자를 국왕으로 추존하게 하는 방식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머물 수원에 성곽 쌓기를 1794년에 시작한 것입니다. 성곽이 3년 만에 완성될 것이라 생각하지 못하고 10년 걸릴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1794년에 시작하면 1804년에 완공이 되고, 그 해가 바로 세자가 15세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정조가 계획한 모든 것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정조는 화성행궁의 규모를 대대적으로 늘리며 수원을 상왕의 수도로 만들 계획을 치밀하게 준비했습니다.
한양은 주상(主上)의 수도, 수원(화성)은 상왕의 수도로 정조가 계획한 상왕은 주상보다 훨씬 권한이 센 것이었습니다. 상왕은 조선 모든 관리들의 인사권과, 사법권 그리고 군대통수권을 갖는 것입니다.
이는 조선에 전례가 있었다. 바로 태종이 세종에게 국왕의 지위를 물려주었을 때의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태종과 세종대의 역사를 정조는 그대로 계승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수도 한양은 이미 노론으로 대표되는 기득권들이 좌지우지하는 지역이었습니다. 국왕 정조가 아무리 개혁을 추진한다 하라도 이들 기득권이 따라주지 않고 오히려 맞대결을 벌인다면 정조로서는 큰 낭패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조는 완전히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수원을 자신의 개혁의 터전으로 삼아 조선 전체를 개혁하는 또 하나의 수도로 만들고자 원대한 꿈을 품고 화성을 축성한 것입니다.

출처 : 김준혁 교수님 / 수원화성박물관

야간에 행궁을 방문하니 더욱 운치 있고 조선시대의 행궁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감동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우리 도심 속에 아름다운 우리의 역사가 생생하게 남아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함을 느낍니다.
친구들과 또는 가족들과 연인들과 함께 밤의 멜로디가 가득한 수원 화성 행궁을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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